[수강 후기] 1강. 평등으로 세상을 보다 - 모두의 평등을 위한 성평등한 일터 만들기
활동가 역량 강화 차원에서 <모두의 평등을 위한 성평등한 일터 만들기> 기획 강좌를 박성우, 박윤준 활동가가 다녀왔습니다.
이번 강좌는 이웃 단체인 '삶과 노동을 잇는 배움터 이짓'(이짓)에서 기획한 강의입니다. 이짓에서 1년 여 넘는 기간 가졌던 페미니즘 세미나 <페세모> 멤버들이 공부한 내용들을 토대로 총 4강의 교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음성지역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기획 강좌를 접하기 쉽지 않고, 더군다나 '성평등한 일터'를 주제로 삼는 강좌는 더더욱 접하기 어렵기에 이짓의 기획 강좌 소식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1강은 '평등'으로 세상을 보다, 라는 제목으로 정누리 님이, 2강은 '사례로 보는 일터에서의 성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제목으로 유진영 님이 강의해주셨습니다. 2시간 가까이 두 강의를 연달아 들으면서 느꼈던 생각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공부들을 정말 많이, 열심히 하셨구나, 우리 사회에 정말 꼭 필요한 강의다!
누리 님의 강의가 (제목과 같이) 성평등한 "관점"을 소개하고, 그 렌즈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끔 만들었다면, 진영 님의 강의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이 어떤 차별 속에 놓여져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 글에서는 누리 님의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스케치하고, 배운 점들을 기록합니다.
성평등은 모두의 평등을 향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힘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우리 사회의 미디어 환경과 정치 조건에서는 정부와 기업과 같은 권력 계층의 말이 평범한 사람들의 말보다 훨씬 더 크게, 훨씬 더 많이, 그리고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대변하기 보다, 강자의 자리에서, 강자를 대변하는 말을 되풀이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누구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성평등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지배적 관점인 국가의 자리, 자본가의 자리, 가부장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보다, 국가와 자본가, 가부장으로부터 겹겹이 억압을 받은 여성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또한 여성 운동은 같은 여성이라고 해도 인종에 따른 차별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누리 님은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분야/범주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 인한 다양성이 존재함을 받아들이고, 이 다양성을 지우는 지배적인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평등 관점은 단지 여성만이 아니라, 모두가 좀 더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관점이고 세계관인 것이죠.

성차별 관점의 역사와 오늘
우리가 성평등 관점을 논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성차별 관점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누리 님은 프랑스 혁명과 인권 선언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18~19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루소, 쇼펜하우어, 칸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널리 알려지고, 인용되고 있는 이들 유럽 남성 철학자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 비판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여성의 이성과 판단 능력은 폄훼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불쾌하고 충격적인 구절을 다시 인용하자면...
- 장 자크 루소(1712~1778): "여성이 남성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에밀>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여성은 매우 유치하고, 진지하지 못하며 생각이 짧다", <여성에 대하여>
-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여성의 철학은 이성에 근거하지 않고, 감각에 근거한다.",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생각들은 꽤나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저평가하는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성평등'을 강조하였지만, 장관들 중 여성의 비중은 30%가 되지 않고, 22대 국회의원 중 여성의 비율은 20%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억압은 어디서 시작되고 있는가?
누리 님은 재생산 부문(출산, 가사, 돌봄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 억압의 근대적 기원을 설명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이 만들어낸 여성상의 변화는, 어떻게 국가 권력이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노동력을 제 입맛대로 착취하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는 방산업체를 앞세워 여성들로 하여금 전쟁 물자를 생산하도록 몰아갔다가, 전쟁이 끝나자 남성 노동자들을 내조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가정 주부로 살도록, 그 삶이 마치 행복한 삶인 것처럼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선전했습니다. 이때 국가가 통제하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몸'. 즉, 여성의 성생활과 재생산권이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벌어들인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누락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일까요? 노동자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노동자가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갖추게 되는지를 살펴보면 답은 금방 나옵니다.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될 때까지 기르고, 돌보고, 남편이 매일 일을 갈 수 있도록 집안일을 하는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력 착취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통해 노동자를 생산(출산)/재생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설명입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통제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감춰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에 대해 함께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성평등한 일터'라는 질문
'우리는 성평등한 일터에서 일하고 있나요?'
'일터에서 우리는 평등한가요?'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일하고 있는 일터, 음성노동인권센터를 떠올렸습니다.
2020년에 충북청주경실련 활동가들에 대한 성희롱 사건이 있었습니다. 성희롱 사건과 그에 뒤이은 직장 폐쇄(사고 지부 결정)에 대응한 '경실련 성희롱 피해자 지지모임'의 활동은 지역에서 큰 반향을 만들어냈습니다. 지역 내 반발(백래시)도 있었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가 성차별, 성폭력의 사각지대였다는 자각과 반성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인권센터의 경우, 여러 논의와 숙고, 공감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친 후에 2024년 운영위원들과 집행위원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처음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성평등 교육을 열기까지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중년 남성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운영위원회에 여성 운영위원들이 다수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진전된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앞으로 성평등 교육, 성희롱 예방 교육을 정례화하고, 조직 내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규약을 만들고, 체계를 정비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나아가 인권센터도 성평등한 일터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육 활동을 벌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침 올해 인권센터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일터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성평등한 일터를 상상하고, 이야기하다보면 사업장의 담벼락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기억이 납니다. 성평등의 관점으로 보면 삶과 노동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해야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2강 후기로 이어집니다.)
'이짓'의 활동이 궁금하다면? https://yeejit.campaignus.me/
삶과 노동을 잇는 배움터 이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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